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2세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*19세 연상의 정부인 [[디안 드 푸아티에]]를 죽을 때까지 사랑했다.[* 참고로 디안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가 앙리 2세보다 나이가 많았다.]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를 어릴 때부터 사랑해, 왕이 된 후에도 여러 작위를 수여하며 곁에 두었다. 덕분에 디안은 왕비 [[카트린 드 메디시스]]를 넘어서는 권세를 누렸으나 앙리 2세가 사망하자마자 모든 입지를 상실하고, 카트린의 명으로 왕에게 선물받은 슈농소 성과 왕가의 보석들도 반환하고 앙리 2세의 장례식 참석마저 거부당한 뒤 조용히 살았다.[* 애초에 총애해주던 왕의 죽음으로 뒷배가 사라진 정부들의 말로는 대부분 이렇다.] *《[[마르탱 게르의 귀향]]》이 처음 나오는 《잊을 수 없는 판결》이라는 책을 발간해 마르탱 게르 사건을 세상에 알린 장 드 코라스(Jean De Coras)와도 인연이 깊었다. 추기경과의 협상에서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고, 그 공으로 [[툴루즈]]의 [[고등법원]] 판사로 임명했으며, 나중에는 앙리 2세가 <비밀혼인에 관한 칙령>을 발표할 때 이를 지지하는 책을 올려 9년간 코라스가 발간한 책을 재인쇄하여 독점적으로 판매할 권한을 하사하는 등, 코라스를 크게 신임했다. *[[잉글랜드]]의 [[헨리 6세]]가 트루아 조약에 따라 백년전쟁 말기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했으나, 트루아 조약의 위법성과 본인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한 [[샤를 7세]]에게 백년전쟁에서 패배하여 프랑스 왕위를 포기했기에 오늘날 헨리 6세는 '앙리 2세'로 인정받지 못한다. *[[프랑스어]]에서 비겁한 술수를 의미하는 관용구인 coup de jarnac, 자낙의 일격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 인물이다. 자낙은 앙리 2세와 동시대를 살았던 가이 샤보트 자낙 남작이었는데, 본인과 본인의 계모가 간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누군가가 퍼트리자 격분해 증인들을 세워 가면서 본인의 무죄를 증명했는데, 문제는 그 소문을 퍼트린 게 왕자 시절의 앙리 2세였다(...), 그리고 앙리 2세는 [[결투 재판]]을 요구했는데, 이유가 가관인 것이 가이가 계모와 간통을 안 했다는 것은 앙리 2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므로 [[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|앙리 2세의 명예를 모욕했다는 것]], 거기에 당대 프랑스 최강의 검객으로 유명한 상테누리의 영주 프랑수아 드 비본느를 결투 재판의 대리인으로 내세우기까지 했다. 거기에 가이는 대리인을 세울 수도 없었기에 필패가 예측되었는데, 앙리 2세는 [[사문화]]되던 결투 재판을 이용해 가이 샤보트가 제풀에 물러나기를 원했던 모양이지만 가이 샤보트는 끝까지 밀어붙였고, [[1547년]] [[7월 10일]]에 벌어진 결투에서 본인의 대리인으로 나갔던 프랑수아 드 비본느가 가이 샤보트를 만만히 보고 방심하고 있다가 무릎에 칼을 맞고 패배,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가 찔렸다는 게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치료도 거부하고 상처 감염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결투 재판에서 패배한다. 이 시점에는 앙리 2세가 이미 즉위한 후였는데 이 패배 직후 앙리 2세는 결투재판을 폐지해버린다(...). 그리고 그 찌르기에서 유래된 coup de jarnac은 기상천외하고 교묘한 술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[[시대]]를 거치다가 비열한 짓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